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펑크 록 (문단 편집) ==== 1977년, 역사적인 해 ==== 1977년은 런던 펑크가 폭발하면서 기록적인 이슈들을 많이 배출한 해였다. 미국에서 펑크록이 단순히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음악을 일궈내는 운동이었다고 하면, 영국에서의 펑크록은 좀 더 복잡한 사회상황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었다. 일단 영국은 당시 거의 [[막장]] 상태였다. 미국도 오일쇼크에 충격을 받기는 했으나 세계 1위의 경제대국으로서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영국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비효율적인 경제구조로 인해 점점 상황이 안 좋아지고 있었다. [[자본가]]들은 과거의 태평성대만 믿고 혁신을 게을리 했으며, [[노동자]]들은 사회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는 노동조건에 불만을 품고 끊임없이 [[파업]]을 강행했다. [[노동당(영국)|노동당]]의 정책은 족족 실패했으며, 결국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까지 받는 형편이 되었다([[영국병]] 참조). 영국은 그야말로 망조가 들어가고 있었다. 공공기관은 기능을 하지 못했고, 많은 젊은이들이 실업수당에 의지해 살아갔으며,[* 1960년대의 영국병과는 달리 이때의 젊은이들은 '''진짜로 일이 없어서''' 실업수당으로 연명했다.] 학교는 계속해서 실업자를 쏟아냈다. 중년층 이상은 젊은이들에게 "자신들이 투쟁해왔던 지난 10년"을 이야기하며 젊은이들의 나태를 질타했다. 영국은 오랜 세월 너무도 변하지 않았고 젊은이들은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상황에서 지루해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인종갈등까지 겹쳐서, 서인도제도([[자메이카]]등)에서 넘어온 흑인, [[파키스탄]]인, 기타등등 다양한 외국인 이주 노동자들이 영국으로 1950~60년대 내내 넘어왔으며, 인종갈등에 대해 전혀 대비책이 없던 런던의 빈민가는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특히나 영국의 [[앵글로색슨]] 백인들은 배타적이었고, 영국의 노동계급은 불안한 사회상황과 인종문제로 인해 폭력사태가 끊이지 않았다.[* 1976년에는 인종화합을 위한 축제였던 노팅 힐 페스티벌에서 경찰과의 충돌로 인해 노팅 힐 폭동이 발발한다. [[더 클래쉬]]는 이때 뜻하지 않게 폭동에 참가했다가 White riot이라는 곡을 쓰게 된다.] 사상적으로도 극단주의가 횡행하게 된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극우]]정당인 [[국민전선]]의 지지도가 올라갔을 정도... 당시 펑크 뮤지션들의 인터뷰를 들어보면 상황이 어느 정도로 심각했는지 알만 하다. >당시에는 엄청났어요. 매일같이 신문과 뉴스에는 파업 소식이 들려왔고, 환경미화원들이 파업해서 길거리에 사람 키보다 높이 쓰레기가 쌓이기도 했고, 무덤 파는 인부들이 파업을 해서 시체가 줄줄이 쌓여있는 경우도 있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실업수당으로 살아갔죠. >---- >스티브 존스, 섹스 피스톨즈의 기타리스트 - 영화 The filth and the fury 중 >사실 저는 그때 직업이 없었어요. 일자리를 구해보려 해도 (급료가 턱없이 낮거나 너무 힘든 일이거나 해서) 마음에 드는 일자리가 없었구요. 그래서 "노느니 뭐하냐 밴드나 해보자"하는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 >빌리 아이돌 - 다큐멘터리 "히스토리 오브 로큰롤" 중 >저는 그때 집이 없어서 연습실에서 자거나 스쿼팅[* squatting. 빈 집에 무단으로 들어가 거주하는 행위. 당시 영국에서 빈민들이 스쿼팅을 하는 건 드물지 않았으며, 네덜란드 또한 당시 스쿼팅이 극심한 국가 중 하나였다.]을 해서 살곤 했어요. 한때는 템즈 강가의 망한 아이스크림 공장에서 살기도 했는데, [[더 클래쉬]]의 초기 곡들은 거기서 쓰여졌죠. >---- >[[조 스트러머]] - [[더 클래시]]의 리드싱어, 기타리스트 영국은 미국과 달리 독특한 생활양식을 고수하는 노동계급이 있었다. 이들은 펑크록의 태도와 정신에 일치하는 면이 많았다. 상류 계층에 대한 적대감, 계급의식, 거칠음 등 다른 나라의 노동계층에서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계층이었다.[* 이러한 점은 [[조지 오웰]]의 르포 작품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에도 잘 드러난다.] 펑크록은 이러한 사회상황을 배경으로 [[디스토피아]]를 그려내는 음악이 된다. "에라이 이놈의 세상 망해라!"가 영국 펑크의 시발점이었던 것. 앞서 말했듯 1976년에 가속화되던 펑크 붐은 1977년에 절정을 찍어서 런던에 활동하는 펑크밴드만 100개가 넘고, 거리에는 찢어진 셔츠와 [[본디지]] 팬츠를 입은 젊은이들이 우글거렸다. 젊은이들의 재킷에는 온갖 반항적인 구호("No future", "Britain's Burning"등)들이 적혀있었고 당장 내일이라도 지구가 끝날 것같은 분위기였다. 이때의 밴드들은 점점 더 과격해졌고, 가사나 사운드에 있어 훨씬 무시무시한 발전을 이루어서 현재의 록 음악의 헤비 사운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섹스 피스톨즈]]는 말할 것도 없고, [[더 클래시]]는 펑크록의 음악적인 부분에서 심도있는 발전을 이끌었다. 1977년에는 한때 런던에서 활동하는 펑크 밴드만 100개가 넘을 정도의 규모였다. 소위 말하는 2세대 런던 펑크 밴드들(슬로터 앤 더 독스, [[이터]], [[999]], 미넌스)이 모두 이때 등장했다.[* 결성 시기 또한 1976~1977년경이었다.] 그리고 영국에서 [[뉴웨이브(음악)|뉴 웨이브]]가 수면위로 떠오른 시기이기도 하다. [[XTC]]같은 밴드들이 1970년대 초중반부터 꾸준히 준비해왔다고 할지라도, 대중적인 인기를 끌게 된 것은 1977년이 다 되어서였다. 스트랭글러즈, 붐타운 래츠, 아담 앤 더 앤츠등의 밴드들이 이 시기에 등장하여 인기를 끌었다.[* 뉴웨이브는 사실 초기에 펑크라는 단어를 대체하기 위한 방책으로 등장했는데(펑크 록이라는 이름으로는 공연장 대관이 어려웠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펑크록이 분화되었고, "신디사이저를 사용하고 덜 과격한 미니멀리즘 음악"이라는 의미로 정착된다. 포스트펑크의 탄생에 중요한 요소를 제공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